금년 89세. 이제 한 달이 지나면 아흔이 되시는 어른이신데
42년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으신 분 이시기도 하다.
닮았다기 보다는 풍기는 모습에서 아버지가 보이는 듯 하다.
우리 형제에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가 없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어릴 적 객지로 돈벌이 나가셨다가 행방불명이 되셨다는데
언제 적 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의 제삿날을 음력 구월 열나흘로 잡아 제사를 뫼시고 있다.
아마도 아버지께서 달이 밝고 오곡백과가 풍성한 가을 날로 제삿날을 정했으리라 생각된다.
아버지 위로 고모 한 분이 계셨다는데
나氏 집안으로 시집을 가셨다는 것만 유일한 정보이고
그 이후로도 아버지와는 연락이 끊겼다고만 전해지고 있다.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앞길이 막막한 채, 할머니는 젊디젊은 나이에 할아버지와 작별인사 한 번 못 나누고
재회의 약속 없이 청상과부 신세가 되었으리라.
가장이 제 구실을 충실히 했었어도 궁핍을 면치 못했던 시절.
봉건적 유교 사상이 뼛속 깊이 박혀 있던 고리타분한 사회제도가
두 자식을 거느린 젊은 여자 일족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막장으로 치닫게 되는데.
주변에 일가 친척들이 살고 있었지만 제 앞가림도 못했던 수준이라
도움을 청하지도, 도움을 줄 수도 없던 형편이었단다.
할머니의 시동생 되시는 종조부께서 급기야 어떤 판단을 내리셨다는데
형수님과 조카들의 장래를 위해 재가를 권유하셨다 한다.
...... 해서
할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김해 김씨 집안으로 재가를 하셨다는데
거기서 삼형제를 더 낳아 기르셨다고 했다.
나의 아버지, 그리고 나의 고모님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며 데려 온 자식을 거두었을 나의 할머니.....
어릴 적 아버지는 씨 다른 이복 동생들과 함께 자랐을 거라 여겨진다.
구차한 가족비사를 아버지는 굳이 우리들에게 이야기 해 주지 않으셨는데
당신의 열등의식이 자식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아니었을까 이해하고 싶다.
내가 열살 정도 되었을 무렵.
남루하게 차려 입은 어떤 사람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그 때 형님과 아버지는 외양간을 손질하고 계셨는데
찾아 온 그 분과 아버지는 잠시 뭔가 이야기를 하셨고
짧은 이야기 끝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우셨다.
그 분이 아버지의 이복동생 삼형제 중 맏이셨는데
수십 년의 세월을 뚫고 이복 형인 아버지가 보고싶어 물어물어 찾아오셨다 했다.
요즘 같으면 자동차로 한시간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서
각각 다른 성씨를 가진 신분 때문에 벽을 넘지 못하고 살아오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선 어릴 적 계부의 집을 나와
밥술은 먹고 살았지만, 자식이 없는 집안으로 양자를 드셨다고 했다.
양부의 성함은 본관이 다른 이호영氏.(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들어서 기억되는 이름임)
그 곳에서 성장하시면서 경주 입실에 살던 어머니와 혼인하시고
결혼 이듬해 돈벌이를 위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한다.
일년을 친정에서 보내시고 어머니도 일본으로 들어가 신접살림을 일본에서 차리셨단다.
꼬박 10년을 일본에서 사시다가 해방되던 해 연락선을 타고 귀국을 하셨는데
그 때 이복동생들 중 맏이만 빼고 두 동생도 함께 일본에서 살다 귀국 하던 중 둘째는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갔다 한다.
위 사진의 인물은 이복형제 중 막내 되시는 김字경字학字이시다.
유일하게 현존해 계시는 분이 신데
나로서는 처음 뵙는 분 이시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할 것없이 자기의 고향과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여우도 죽을 때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首丘初心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몇년 전 문중 카페를 하나 개설했지만 거의 개점휴업(?)상태이다.
내 나이 또래 위쪽으로는 컴맹이라 접근을 하지 못하고, 아래 나이는 뿌리에 관심이 아직 없는 세대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추석 지나고 한 달 후.
음력 시월 열나흘. 할아버지의 제사를 모시러 큰집에 들렸는데
큰형님께서 언젠가 하셨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다시 끄집어 내셨다.
아버지 이복동생 집안의 소식을 간간히 듣곤 하신다는데
이복동생 중 가장 아버지를 많이 닮은 분이 생존해 계신다며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뵙고 싶으시다고 하셨다.
그 분께서도 우리를 보고싶어 한다고 하셨다는데...
바램은 간절하나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시는 것 같아
아무래도 내가 이 일을 추진하고 마무리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느껴졌다
이젠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이므로..
.
바쁜 일정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날을 잡아서
형님 두 분을 모시고 경기도 장호원으로 달렸다.
아버지를 많이 닮으셨으니 생전 아버지를 다시 뵙는다는 설렘도 컸지만
할머니께서 이복동생 중 막내인 저 어르신과 함께 살다 돌아가셨는데 산소가 근처에 모셔져 있다는 것.
처음 할머니 산소를 뵙고 온다는 기대로 가슴이 벅찼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서
GPS가 가리켜 주는 방향에 따라 이동을 하는데
차창 밖을 내다보시던 큰형님께서 갑자기 "여기다. 세워라"하시며
마당에 나와 서성이던 어르신을 가리키셨다.
형님은 한 눈에 알아보신 것이다.
아버지를 빼어 닮았다고, 살아 생전 어머니가 말씀하셔서 대충 짐작은 했지만,
뵙는 순간 그야말로 아버지의 모습을 읽을 수 있어서 먹먹하기만 했다.
40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다시금 아버지를 뵐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감격이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할머니의 산소는 만날 수 없었다.
수십년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활용 하지 못한 어리석고, 아쉬웠던 세월들..
불과 1 년전, 할머니의 묘소 부지에 무슨 개발지로 지정되면서 분묘를 화장하여 뿌렸다 했다.
그저 망연자실.... 큰형님의 실망이 크셨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모든 것이 덮여지고, 잊혀 지기를 기다렸단 말인가?
삶의 방식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어려웠던 그 시절.
자랑스런 삶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던 선대들로 하여금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수치를 덮거나 미풍양속을 지키기 위해서 한 가족의 역사가 왜곡 되는 일이 오히려 부끄럽다는 생각이다.
현세에 풍요를 누리고 사는 우리들이 당신들의 그 메말랐던 시대적 질곡을 이해하고 위로해야 한다.
치부가 덮여서 미화로 발전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진실 앞에서는 부질 없을 뿐이다.
우리 가족사를 남에게 까지 굳이 알릴 필요는 없지만
그 피를 이어받는 후대들에게 알려주는 진실이 필요할 때라고 여겨진다.
다시금 선대들의 애잔한 삶이 현실에서 보이는 듯 하여
복받치는 뜨거움을 삼키며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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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장호원을 다녀온 지 두 달쯤 지났을 무렵 큰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장호원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냥 먹먹했다 아무 생각없이..
살아 생전에 뵙고 왔으니 여한 없다고 말씀 하셨지만 많이 섭섭하신 기색이다
"섭섭하긴 하지만 상문 갈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 가지 말자" 형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달 전 찾아 뵙겠다고 미리 연통을 넣고 찾아갔는데
겨우 거동할 수 있는 노인네만 남겨 두고 그 집 식구들은 모두 자리를 비웠었다.
보고자 하는 대상만 남겨둔 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평생을 통틀어 단 일 회성 만남인 데도
굳이 배석을 피했다는 게 괘씸했다
망자가 떠남으로써 모든 인연은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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