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
평생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름 삼돌이
1987년 여름 고려대와 동덕여대에서도 민주화 시위가 잦았고 매캐한 최루탄 가스가 서울 변방이었던 미아리,종암동,하월곡동 일대에도 가만 놔두지 않았던 시절이다
우리집 큰녀석이 86년생인데 얼라 키우기가 힘들었던 기억도 난다
요즘 미세먼지는 바깥에 나가지 않으면 되지만 한여름 에어콘도 없던 그 시절에는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었었다.
페퍼 포크에서 쏟아지던 최루탄 가스는 여름 내내 동네를 괴롭혔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느라 이야기가 옆길로 샜다
그 시절 가라오케 열풍으로 동네에서도 스탠드바라는 술집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는데
산에서,들에서,강가에서 또는 여행지에서 음주가무를 육성으로 즐기다가
비까 번쩍 싸이키가 돌아가는 무대로 올라가 반주에 맞춰 마이크 잡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데서 기성세대들은 환장을 했다
하월곡동 밤나무골 시장
작은 여관을 하던 동네 아줌마가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노래도 사랑했던 그녀의 애창곡은 김상희의 울산 큰 애기
그 아줌마가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지만
내가 그 동네로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그녀는 노래방 스타로 등극하며 울산큰애기에 등장하는 "삼돌이"로 명명되어 있었다.
붙임성 좋고 활달했던 그녀 동네에서는 삼돌이 모르면 간첩이었다.
당시 나는 집사람과 과속에 의한 충동적 야합(?)으로 결혼 전 살림을 차렸었고, 큰아이 백일이 지날 즈음에 결혼식을 올렸었다.
솥,냄비 하나. 숟가락,젓가락,밥그릇 두 개가 전부이던 살림살이였는데 새로 이사 온 풋내기들의 살림에 동네사람들이 기웃거렸고
비공인 반장 역할을 하던 삼돌이도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동네 사람들과 익숙해질 무렵, 시장통 그릇가게로 나를 부르더니
나한테 선물을 하나 준비했으니 잘 쓰라며 다섯 개의 세트로 포개어진 스텐 대야(일명 다라이)를 내밀었다.
"신혼살림에는 이게 꼭 있어야 하는데 그걸 내가 해 주는 거야"
나를 스쳐간 많은 사람들 중에 삼돌이 아줌마는 아주 평범했고 지속적인 교류가 없다면 금방 잊혀질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이웃 아줌마의 그 선물이 평생 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 깊게 남을 줄은 그땐 미처 몰랐었다.
작은 것은 양푼으로 그다음은 나물 무침이나 쌀을 씻는 볼로 중간형은 개수대 설겆이용으로 큰 거 두 개는 김칫거리용으로...
참 열심히 그 그릇들을 썼는데도 아직도 반짝거리며 곁에 남아있고,평생도 모자라 대를 이어 삼돌이를 기억하게 만드는 유물로 남게 되었다
삼 년쯤 지나고
충청도가 고향이던 그녀는 혼자 여관을 꾸리며 살았는데 장기 손님으로 투숙 중이던 노름쟁이한테 꼬드켜서 여관을 처분하고 신길동으로 이사한 뒤 소식이 끊겼다.
언감생심 꿈에도 없던 울산이라는 도시에서 30년 가까이 살았었다.
어쩌면 울산 큰 애기를 부르던 삼돌이와의 인연으로 내가 울산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운명은 아니었는지....
오늘따라 그녀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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